이 그림책은 다른 그림책에 견주어 훨씬 얇지는 않다. 그림이 주는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일부러 글이 빠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 글은 책 전체를 통틀어 단 두 줄뿐이다. “서커스가 왔습니다”, “서커스가 떠나갑니다”. 이러한 단순한 경과 보고말고는 아무 말 없이 그림만 계속된다. 그것도 한 번 에둘러가는 법 없이, 서커스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의 그림이 곧장 펼쳐진다.

우리 나라에도 한때는 마을 마을 돌아다니며 아이들 코 묻은 돈, 할아버지 쌈짓돈 할 것 없이 마을의 여윳돈이란 여윳돈을 싹쓸이 하던 유랑 서커스단이 있었다. 요즘에도, 그것도 번연히 서울 시내에서, 비나 겨우 가릴 만한 허름한 천막을 치고 공연을 하는 동춘이니 서울이니 하는 서커스단이 있기는 하다. 볼거리 들을거리 지천으로 넘치는 요새야 어린 시절 향수를 달래는 나이 지긋한 어른들의 한두 시간 추억거리이거나, 촌스럽고 어설픈 것도 새로운 볼거리랍시고 호기심이 동한 아이들의 잠깐 눈요깃거리일 뿐이다. 하지만 구경거리 흔치 않았던 예전에는 서양에서나 우리 나라에서나, 유랑 서커스단의 등장은 온 마을이 흥청거릴 축제였을 것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작가가 왜 글을 줄일 수밖에 없었는지 절로 드러난다. 지금 엄마가 된 이들의 어린 시절을 흥분시켰던 뽑기의 달콤함이나, 몇 년 전에 많은 아이들을 단단히 열오르게 만들었던 오락 스트리트 파이터의 재미를 글로 온전히 옮길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 단연 하늘이 내린 문재를 타고난 사람이다. 문재는 그만 못할지 몰라도 천부적인 화가인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에게는,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일상에 찌든 마을에 서커스가 나타났을 때에 어른이고 아이고 하다못해 강아지까지도 들썩이는 달뜬 분위기를 오롯이 표현하는 데에는 그림이 훨씬 수월했을 터이다.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에게 으레 붙는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칭은,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고 전 세계적으로 그림책이 8백만 부가 넘게 팔려나간 덕에 공치사로 붙는 것은 아니다. 일일이 글로 쓰진 않았어도 서커스의 흥분이 직접 관람석에 앉아 무대를 지켜보는 것처럼 생생히 전해진다. 장면 장면에서 웅성거림과, 찬탄의 한숨과, 박수소리며 휘파람소리, 때로는 이국적인 음악 소리, 기합 넣는 소리, 휘두르는 채찍 소리가 들릴 듯하다.

아이들에게 최고 인기는 역시 동물들이다. 앵무새며, 강아지며, 물개며, 곡예하는 백마며, 덩치에 걸맞지 않게 유리병 위를 아슬아슬 건너는 코끼리, 자전거를 타는 곰, 외줄타는 원숭이, 어릿광대들이 뒤집어 쓴 가짜 말까지 온갖 동물이 등장한다. 특수 렌즈를 써서 촬영한 것처럼 과장된 원근법 덕분에 서커스가 벌어지는 무대는 더욱더 크게 느껴지고, 자전거를 타고 건너는 줄은 끝없이 길어 보인다. 하지만 이 무대의 단연 압권은 인간탑 쌓기 묘기. 보통 사람들 생각의 수준을 뛰어넘는 환상적인 묘기로 이름 높은 북경 서커스단도 감히 시도해 보지 못할, 몇십 명은 족히 되는 건장한 남자들이 주욱 몇 층으로 늘어선 묘기는 현실에서는 절대로 가능할 법하지 않다. 문득 여태껏 펼쳐졌던 서커스의 장면들이 실제의 것인지, 혹시 이 모두가 환상은 아니었을지 기연가미연가해진다.

서커스단이 마을에 나타난다는 파격은 새로운 일이라고는 절대로 일어날 법하지 않은 시골 마을 사람들이 꿈속에서도 마음 졸이며 기다릴 사건이지만, 꿈 같은 축제는 곧 끝나게 마련이다. 엉덩이를 보이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코끼리를 맨 뒤로, 서커스단은 그들을 손꼽아 기다릴 다음 마을을 찾아 떠나간다. 흥분과 환호와 달뜬 분위기도 서커스단을 따라 마을을 떠나가고, 남은 것은 “서커스단이 마을을 떠나갑니다”라는 글과 책장에서 배어나오는 아쉬움뿐이다.